갑오년 9월(음력) 마침내 농민군이 다시 일어섰다. 
전봉준은 각지의 관아에 재기병을 알리는 통문(양력 10월 8일)을 보내 농민군 재기병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일본군을 쳐 물리치고 그 거류민을 국외로 구축할 마음으로 다시 기병하자"는 취지의 격문을 받아 든 각처의 농민군은 군현의 무기고를 헐어 무장을 갖추고 삼례와 남원을 거점으로 한 전봉준, 김개남 휘하로 모여들었다. 한편 최시형 교주는 청산에 각 포 접주들을 불러 모아 전봉준과 협조하도록 당부(양력 10월 16일)하고, 궐기하라는 통문을 내렸다. 이로써 동학 농민군의 9월 재봉기는 호남을 넘어 전 조선이 궐기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11월 9일(양력) 삼례를 출발한 호남 농민군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이 논산에서 합류하기까지 한 달이 소요되었다. 그해 갑오년 10월 한 달은 일본 침략군과의 일전을 앞둔 농민군이 내뿜는 혁명적 열기로 하여 전 조선이 후끈 달아올랐을 것이다. 

가을걷이를 뒤로 한 농민군의 결의
당시 농민군들은 과연 가을걷이를 제대로 마치고 전장에 나섰을까? 농민군들이 북상을 시작하는 11월은 이미 초겨울이라 할 만하니 그렇다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형 콤바인이 들어가 순식간에 추수를 마쳐버리는 지금과 달리 논바닥에 서 있던 벼가 알곡이 되어 가마니에 담기기까지 무수한 노력과 공정이 필요했던 당시의 사정을 고려하면 절대다수의 농민군은 가을걷이를 뒤로 하고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을 터, 실제 가을걷이는 남은 식솔과 이웃들이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자연계의 자연스러운 순환과 달리 재봉기를 단행하는 농민군이 가는 길은 하던 일을 내던지고 강단 있게 나서는 생사를 건 결의와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러기떼는 남으로 날고 농민군은 북으로 올라가는 당시의 정황이 한 폭의 풍속화 같은 화폭에 담겼다. "나락 익기만 기다렸다"는 문구가 되레 가을걷이도 채 마치지 못하고 길을 나섰을 농민군의 결연한 각오와 의지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척왜양', 농민군의 시대정신
농민군 2차 봉기에는 대원군의 밀지와 밀사, 전봉준, 김개남, 송희옥 등 농민군 지도자들 사이의 교감이 일정하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원군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내정간섭과 침략 야욕이 날이 갈수록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양반과 보부상뿐 아니라 농민군까지 다 같이 나서서 일본군을 치고 나라를 구하자"는 요지의 밀지를 각처에 보냈다.

하지만 이에 호응하고 나선 양반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호남의 농민군만이 이에 호응했다 할 수 있다. 이는 ‘척왜양’의 기치를 바탕에 깔고 일본군을 일차적으로 제거해야 할 공동의 적으로 인식한 데 따른 것으로 당시 농민군의 시대정신이 외세의 침략보다도 농민들의 저항을 더 적대시했던 양반 족속들의 알량한 지배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우월하고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시대 향한 민중들의 투쟁
들판의 곡식이 무르익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역사상 유례없는 쌀값 폭락 사태를 초래한 정부와 정치권에 맞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농민군들 또한 오늘은 논밭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지만 내일모레 서울로 진격할 날을 손꼽아 헤아리고 있다. 들판은 빠르게 비워질 것이고 11월 한 달은 농민들의 서울 진격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어디 농민들 뿐인가? 정권 교체를 넘어 체제 교체를 염원하는 민중들의 투쟁은 128년 전 농민군이 이루지 못한  ‘보국안민’ ‘척양척왜’ ‘제폭구민’의 꿈을 안고 자주와 평등, 통일의 새로운 백 년을 향해 오늘도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