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천개벽도, 2014, 45X92cm, 목판화

폐정개혁 12개 조

△도인과 정부는 묵은 감정을 버리고 서정에 협력할 것 △탐관오리의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벌할 것 △노비문서는 불태울 것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평양립을 벗길 것 △청춘 과부의 개가를 허용할 것 △무명잡세를 폐지할 것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관리를 채용할 것 △외적과 내통한 자는 엄징할 것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나간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전주화약 이후 전라도 각 고을에 집강소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전주성에서 물러났으되 무장을 풀지 않은 농민군이 주체가 되어 폐정을 개혁하는 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집강소의 폐정개혁 12개 조항은 백성들에게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같은 환희와 축복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신들이 내건 폐정개혁안을 스스로의 힘으로 실현시켜 나가는 가운데 집강소와 농민군의 위세는 비약적으로 증강되었다.

“동학에 물든 지 오래되었지만 겁을 먹고 엎드려 관망하던 자들이 일시에 함께 일어나… 총과 칼을 잡고 무리를 이루고 진을 결성하여 산과 들에 가득했다… 이들은 마치 찢어진 솜에 불이 붙은 것처럼 어느 곳에서나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고, 엎질러진 수은이 땅에 배듯이 틈마다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천둥처럼 내닫고 바람처럼 달려서 그 묵고 쌓인 원통하고 분한 기운을 다 풀었다.”(황현, 오하기문)
“흥덕 이남 나주 이북 일대의 지방에서는 모든 정령이 모두 동학당의 손에서 나와 지방관은 단지 그 콧김을 살피는 형편이 되었다.”(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호남 일대에 농민군에 의한 집강소 통치체계가 확립되기까지 두 달여의 시일이 소요되었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으며 각 고을의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되었다. 나주와 운봉은 끝내 농민군 주도의 집강소가 설치되지 못한 지역으로 남았다.
집강소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국가권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와 자립의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기구다. 집강소는 본래 동학혁명 이전부터 향리에 있던 민간의 자치 기구였다. 이러한 집강소가 농민군 무력의 힘의 우위 속에서 수령의 권한을 대체하는 민중권력 기관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

당시 농민군은 구성면에서는 소농, 빈농이었고 신분면에서는 천민들이었으니 조선의 낡은 통치체제를 뿌리로부터 무너뜨리며 땅과 하늘이 뒤집힌 새 세상을 실제로 맞이하고 맛보았던 것이다.
‘후천개벽도’는 당시의 상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폐정개혁 12개 조항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판화 속 인물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화승총과 죽창을 거머쥔 농민군, 평양립을 쓴 백정, 젖먹이가 딸린 농민 일가, 나이 어린 청춘 과부… 한 분 한 분이 어떤 의미로 새겨진 분들인지, 이들이 왜 하나같이 행복한 표정들인지, 새 세상을 맞이한 이들의 가슴은 얼마나 벅차게 부풀어 오르고 있을 것인지를 헤아려 본다.

이처럼 조선 땅 한 귀퉁이에 새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을 보았을까? 구름 한 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 그러나 그 순간에도 조선의 하늘에 드리운 두터운 먹장구름은 더욱 무겁게 조선의 운명을 짓누르고 있었으니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의 침략 만행이 노골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의 거듭된 철군 요청에도 꿈쩍하지 않던 일본군이 급기야 경복궁을 점령(양력 7월 23일)하고 고종을 포로로 잡았다. 친청 내각을 친일 내각으로 교체하고 청국과 전쟁에 돌입(풍도 해전, 7월 25일)했다. 청나라도 일본도 아닌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외국군대에 침략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던 그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농민군의 앞길에도 조선의 명운을 건 새로운 결전의 시기가 시시각각 도래하고 있었다.

 

집강소, 조선의 새 하늘을 열다 - 한국농정신문

전주화약 이후 전라도 각 고을에 집강소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전주성에서 물러났으되 무장을 풀지 않은 농민군이 주체가 되어 폐정을 개혁하는 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집강소의 폐정개혁 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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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동학농민혁명, 판화로 읽다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