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당히 무던하고 둔감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러함에도 나흘간 지역을 돌며 논을 갈아엎은 후과는 상당했다.
고상하게 말하자면 정신적 피로라고나 할까? 오늘은 토요일, 선운사 고라당으로 간다.
생각하기는 이슬이 깨기 전에 돌아오려 했으나 꽤 긴 산행이 되고 말았으니, 최근 몸이 급격히 가벼워진 탓이다.

그런데 선운산은 어디에 있는 걸까? 선운사에 선운산은 없다.
선운사 일주문에는 '도솔산 선운사'라 쓰여 있으나 도솔산도 없다. 선운사 중들이나 그리 불렀던 모양이다.
최근 선운사 뒤 쪽 수리봉을 선운산이라 이름 짓고 그리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이 또한 일반적이지 않다.
선운산은 선운사를 에워싸고 있는 주릉에 망라된 봉우리와 그 골짜기들을 통칭한다 보면 되겠다.
하여 고창 사람들은 '선운사 꼬랑' 혹은 '선운사 고라당'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선운사를 에워싼 주릉은 그 길이가 20여 km에 달해 한 바퀴 돌려면 하루는 족히 걸린다.

안으로는 평평하고 유순하게 흐르는 산세지만 밖으로는 꽤 가팔라 오르자면 꽤 힘이 든다.
선운사 고라당은 높이에 비해 길고 깊어 그 옛날 고창 유격대(야산대)는 선운사 고라당을 근거지로 오랫동안 버티며 싸울 수 있었다 한다. 무려 1955년까지..
낮다 하여 히피 볼 산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선운사 고라당에는 무수히 많은 길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부도전을 빠른 걸음으로 스쳐 지난다.
토요일 아침, 의외로 사람이 없다.
꽃무릇 지고 단풍은 아직 들지 않았으니..

허나 늦둥이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굵직한 나무에 기대어 꽃대를 올리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언제나~ 오려나..

비가 언제 왔던고?
물 흐르는 소리 거의 들리지 않는다.
도솔천 곳곳이 작은 물 웅덩이로 변했다.
그 속에 산천어만 한 중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다.
애고 도솔천아..

천마봉 지나..

비로소 제대로 된 숲길로 접어든다.
길은 뚜렷하나 사람을 좀체로 만날 수 없는 길, 거미줄이 자꾸만 얼굴에 엉긴다.
이 길을 따라 도솔천을 끝까지 거슬러 능선에 오르면 배맨바위와 쥐바위 중간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인적 없는 산길에 접어드니 짐승들의 흔적이 나타난다.
뿔질의 흔적, 아마도 고라니..

진흙 목욕을 마치고 몸뚱이를 문지른 흔적,
높이 등으로 미루어 귀여운 아기돼지의 소행인 듯..

사람의 흔적, 축대를 꽤 길게 쌓아 올렸다.
누가 머물렀을까?
금속탐지기 가지고 다시 와 볼 일이다.

계곡이 끝나고 시작된 오름길, 능선 직전 바위 지대에서 조망이 터진다.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도솔천 흐르는 유순한 골짝이 길게 누워 있다.

예상했던 대로 정확히 배맨바위와 쥐바위 중간, 배맨바위 쪽 200m 지점 청룡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배맨바위 뒤로 칠산바다가 펼쳐지고 멀리 위도가 아스라이 떠 있다.

다시 쥐바위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쥐바위는 왼쪽 두 번째 봉우리에 있다.

쥐바위에 당도해 배맨바위를 바라본다.
쥐바위는 탁월한 조망처, 선운사 안쪽 고라당을 빼고는 막힘이 없다.

배맨바위, 그 너머 위도

배맨바위를 바로 밑에서 올려다보면 거대한 코브라가 머리를 치켜든 형상이라 썩 기분이 좋지 않다.
보는 지점에 따라 모양이 달라 거북바위 혹은 애기업은바위로 불리기도 한다.

해리 평지리 일대가 내려다 보인다.
들판은 아직 황금빛으로 물들지 않았는데 일부 논들은 벌겋게 보여 뭔가 심각한 병충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아산, 성송 들판 너머 멀리 영산기맥 산줄기가 흐르고 성송 암치에서 가지 쳐 들판 가운데 점점이 떠 있는 나지막한 산들을 따라 아슬아슬 이어지는 산줄기 하나 이 짝으로 달려온다. 이 짝 최고봉 경수봉에 이르게 되는 경수지맥이다.
방장산 벽오봉에서 가지 쳐 소요산에 이르게 되는 소요지맥과 더불어 고창 땅을 가르는 가장 굵직한 산줄기 되시겠다.
그러니 고창 땅의 상당 부분은 영산기맥과 소요지맥, 경수지맥이 품고 있는 셈이다. 그 안에 유일하게 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천강이 흐르고 경수봉과 소요산은 그 강을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룬다.

아산, 무장, 성송 방면 고창 들판은 구릉 같은 야산이 발달한 '비산비야'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데가 사람이 살기 좋았을까 고창은 우리나라 최고의 고인돌 밀집 지역이다.
그 많던 낭깥들은 다 깎여 논이 되고 밭이 되었다.
낮은 데 갈면 논이 되고 높은 데 갈면 밭이 되고..

한참을 쉬다 다시 길을 나선다.
산은 몹시 메말라 먼지가 푸석거리고 어지간한 풀들은 생기를 잃고 말라간다.
산그늘 아래 까실쑥부쟁이 한 포기 생기를 잃지 않고 어렵사리 버티고 있다.

사자바위로 향한다.
도솔천을 사이에 두고 천마봉과 맞짱 뜨고 있는 사자바위는 선운사 고라당을 가장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조망 명당이다.

사자바위, 어찌 보면 해태 같기도 하고..
사자 대가리에 타고 앉으니 사면팔방 막힘이 없다.

천마봉과 도솔암 일대의 바위들, 아주 먼 옛날 백제 사람들과 그리 멀지 않은 옛날 동학 농민들의 비원이 서린 미륵불도 보인다.

도솔암 마애석불
도솔계곡 상류

방장산 방면, 병풍바위 너머 화시산, 그 너머 방장산과 영산기맥..

오른쪽 끝 희여재, 그 아래로 희여재 골짝이 길게 누워 있다.

투구바위

사자바위에서 도솔암 쪽으로 바로 내려가려던 생각을 바꿔 능선 따라 투구바위로 향한다.
물이고 뭐고 다 떨어졌지만 몸이 너무 가벼웠던 것이다.
길은 줄곧 내리막이다.

투구바위 틈새 속살바위,
난이도 높은 바윗길을 오르는 바위꾼들 힘쓰는 소리가 쩌렁쩌렁 메아리친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데를 기어오를 생각을 할까?
나는 고개를 내두르고 혀를 찬다.
나는 그저 걷는 게 좋다.
투구바위 지나 얼마간 산길을 더 타면 도솔제에 이르게 되고 산길도 끝난다.
나의 산행도 거기서 끝나게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