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칠봉은 장군봉을 중심으로 내칠봉, 외칠봉을 합하여 봉우리가 도합 열세 개.
고만고만 오밀조밀한 봉우리 가운데 장군봉(해발 186m)이 최고봉이다.
완산칠봉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용머리고개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용과 관련된 전설이 깃든 용머리고개는 전주에 입성한 농민군, 농민군을 뒤쫓아온 관군 모두가 넘어야 했던 전주의 관문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쇠락한 고개, 고개 좌우에 폐건물, 문 닫은 가게들이 즐비하다.

용머리고개

농민군이 용머리고개를 넘어 전주성으로 들이치던 당시의 상황을 오지영의 <동학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때는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전주 서문 밖 장날이라. 무장, 영광 등지로부터 사잇길로 사방으로 흩어져 오던 동학군들은 장꾼들과 함께 섞여 미리 약속이 정하여 있던 이날에 수천 명의 사람들은 이미 다 시장 속에 들어왔었다. 때가 오시(오전 11시 - 오후 1시)쯤 되자 장터 건너편 용머리 고개에서 일성의 대포소리가 터져 나오며 수천 방의 총소리가 일시에 시장판을 뒤엎었다. 별안간 난포 소리에 놀란 장꾼들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뒤죽박죽이 되어 헤어져 달아났다. 서문으로 남문으로 물밀듯이 들어가는 바람에 동학군들은 장꾼들과 같이 섞여 문안으로 들어서며 한편 고함을 지르며 한편 총질을 하였다. 서문에서 파수 보는 병정들은 어찌 된 까닭인지를 몰라 엎어지며 자빠지며 도망질을 치고 말았다. 삽시간에 성안에도 모두 동학군의 소리요 성밖에도 동학군의 소리다. 이때 전봉준 대장은 천천히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들어와 좌(座)를 선화당(감사의 집무실)에 정하니 어시호 전주성은 이미 함락이 되었다

농민군이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자 뒤따라온 경군은 용머리고개와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차지한 농민군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날 이후 농민군과 경군은 용머리고개와 완산칠봉 이짝 저짝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는데 딱히 누가 누구를 압도하진 못했으나 농민군 측의 피해가 매우 컸다.

용두봉

용머리고개에 차를 두고 산길로 접어든다.
첫 번째 봉우리는 용두봉, 아직 가을의 잔재가 남아 있다.
문화재 발굴 중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는데 실제로 발굴 중인 건지 중단된 채 방치된 것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산길은 잘 닦여 있다 못해 반질반질하다.
연달아 산봉우리를 타 넘는다.

백운봉
옥녀봉
장군봉

과히 힘들이지 않고 주봉에 당도했다.
장군봉에는 이층짜리 팔각정이 세워져 전주 시내 등 인근 산천 경계를 조망할 수 있다.

장군봉에서 바라본 구도심, 풍남문은 왼쪽 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나 경기전 등 성 내부가 환히 내려다 보인다.
하루 차이로 농민군을 뒤쫓아온 경군은 용머리고개를 넘어 완산에 진을 쳤다. 초토사 홍계훈은 1,500여 군사를 건지산, 기린봉, 오목대, 황학대 등에 배치하여 전주성을 포위했다. 본영은 용머리고개 남쪽 산 중턱에 설치했다 하니 장군봉보다 좀 더 전주성에 근접한 투구봉 근처가 아닐까 싶다. 전주성을 포위한 경군의 선제공격으로 전투가 개시되었다. 전주성을 사이에 둔 공방전, '완산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신(홍계훈)은 주의 남쪽에 있는 완산 위에 결진하고 대포 3발을 시험 삼아 성내에 쏘았을 때 적도들이 서문 양문을 열고 수천 명이 일시에 뛰쳐나와 날뛰면서 달려왔습니다. 남문으로 나온 적들은 백포 장막으로 몸을 가리고 남쪽으로 올라오고 서문으로 나온 적은 날뛰면서 산의 서쪽으로 올라오며 성내에 있는 적들은 성루 위에 한 줄로 서서 일제히 아군을 향해 끊임없이 포를 쏘아 탄환이 비 오듯 하였습니다.
-양호초토등록<동학란 기록>

투구봉 뒤로 숲에 둘러싸인 경기전이 보이고 사진 왼쪽 귀퉁이 싸전다리가 보인다.

이날(28일) 오전부터 날이 저물도록 양군 간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전투 결과에 대해 홍계훈은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고 천보총을 쏠 수 있는 자 30인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적을 참획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농민군 측에 다소 피해가 컸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관군이 성 안을 향해 대포를 쏘아대서 경기전이 훼상했고 성 안팎의 수천 호가 불에 탈 정도로 관군의 포격이 격심했다.

농민군이 전주성에 머문 기간은 열흘, 이날 이후로도 5월 3일까지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장군봉에서 전주성 방향 산길을 잡아 내려간다. 장군봉과 탄금봉 사이 능선 안부에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탑 왼쪽 '보국안민'의 '보'자가 잘못 새겨져 있다. 保가 아니라 輔가 맞다.
농민군들은 '나라를 지켜'서가 아니라 '나라를 바로잡아'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했던 것이다.

탄금봉
매화봉

전주성에 가장 근접한 봉우리에 보지 못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전주 동학농민혁명 녹두관, 과거 일제 감점기 때부터 있던 상수도 물탱크를 철거한 자리에 세웠다 한다.
마침 아는 분이 근무하고 있어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

박홍규 '후천개벽도'
박홍규 '무명 동학농민군'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묘

전주 동학농민혁명 녹두관은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안장한 시설이었다.
진도에서 처형된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이 일본인(사토 마사지로)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홋가이도대학 표본 창고에서 신문지에 싸인 채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그의 유골에는 '1906년 진도에서 효수된 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1996년, 1년 간의 노력 끝에 국내로 모셔왔으나 신원을 밝히지 못하고 또다시 23년이나 방치되었다가 곡절 끝에 이곳에 안장된 것이다.

여러 기법을 동원해 복원한 농민군 지도자의 흉상, 늠름하고 잘 생기셨다. 40대로 추정한다는데 무척 동안이시다.

녹두관 지붕(투구봉)에서 바라본 경기전, 포를 여기다 걸고 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당시 포의 사정거리가 얼마나 되었을지 궁금하다.
그런데 이곳은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완산칠봉 봉우리에서 제외되어 있다.
일곱 개가 넘으니 뺀 건지..

이제 발길을 돌려 다시 장군봉으로 되짚어간다. 장군봉 지나 외칠봉을 답사하면 오늘 산행이 끝나게 되겠다.

무학봉
검무봉
선인봉
모란봉
금사봉
매화봉
도화봉

산길은 꽃밭정이 부근에서 끝난다.
택시 잡아타고 원점으로..
완산칠봉 답사 끝.

우리는 지금 어떤 고개를 넘고 있는가?
우린 우리의 재를 넘을 뿐..
뒷날의 사람들이 다시 재를 넘을 것이다.
길이 멀다, 가자꾸나.
후대들을 위하여..

'동학농민혁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노리 가는 길  (1) 2022.12.21
동학농민혁명 완산 전투  (0) 2022.12.17
최 보따리, 해월 최시형  (0) 2022.11.17
나락 익기만 기다렸다.  (0) 2022.10.19
바람 앞에 서다.  (0) 2022.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