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2021, 200X100cm, 목판화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격전 우금티 전투가 개시되었다.

나는 장성 갈재 아래 입암에 서 있다. 잠행에 나선 전봉준 장군이 스며들었던 입암산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무 말이 없다. 그이의 발자취를 거꾸로 밟아 올라간다. 곧게 뻗은 국도를 달린다. 태인, 원평, 전주 스쳐 삼례, 여산, 논산, 노성 지나 이인.. 북진하는 농민군이 지났던 고을들이 휘리릭 지나간다.

곰티재로 향한다. 11월 22일 1차 공주전투, 농민군은 우금티에 앞서 곰티재를 넘어 공주를 공략하고자 했다. 농민군 복장의 전봉준 장군은 붉은 덮개가 휘날리는 커다란 가마 위에서 열정적으로 전투를 독려했다. 곰티재 너머 공주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예사롭지 않은 산세, 농민군이 치고 올랐을 남쪽 사면은 몹시 가팔라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물샐틈없이 공주를 에워싸고 있는 산줄기가 야속하다.

12월 5일 우금티 전투가 개시되었다. 우금티 고갯마루에서 견준봉 방향으로 산길을 잡는다. 곰티재에서 우금티에 이르는 산길 내내 산재하던 참호들이 보다 뚜렷하고 견고한 형태로 밀집되어 있다.
우금티와 견준봉 사이, 이 곳이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농민군이 사정거리에 들자 조일 연합군은 질서 정연하게 화력을 쏟아 부었다. 고막을 찢는 포성에 이어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서는 흙더미에 섞여 찢어진 살이 솟구쳤다. 일본군은 능선에 몸을 감추고 있다가 농민군이 다가오면 일제히 일어나 구령에 맞춰 사격을 가한 후 몸을 감췄다. 농민군은 능선에 잠복해 있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힐 아무런 무기도 지닌 게 없었다.. 한때 농민군 이백 여명은 우금티 정상 이백 보 앞까지 이르고, 그중 오십여 명은 몇 발자국 앞까지 진출했지만 끝내 재를 넘지 못했다. 이규태(정부군 선봉장)는 다음 날 "아아, 저 몇 만 비류의 무리가... 왼쪽에서 번쩍하다가 오른쪽으로 튀어나오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죽을 각오로 먼저 산을 오르는데, 저들은 무슨 의리가 있는 것이며 무슨 담력이 있습니까. 저들의 행동을 생각하니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해집니다."라고 술회했다.(붕준이 온다, 이광재 저)

통한의 우금티여!

일단의 농민군은 새재를 넘거나 곰나루 쪽으로 우회하여 봉황산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이들은 봉황산과 일락산 사이 하고개를 넘어 충청 감영을 들이칠 계획이었다. 농민군이 뚫고 가고자 했던 혈로가 눈에 잡힌다. 하지만 농민군은 하고개로 향하는 골짝을 돌파하지 못하고 싸늘한 시체가 되어 송장배미와 그 일대에 자곡차곡 쌓여 시산혈해를 이뤘다. 나는 농민군이 돌파하고자 했던 그 혈로를 따라 충정감영에 이르렀다.

충청감영 터에서 우금티 방면을 바라본다. 불과 오리길.. 아~ 통한의 우금티여!

우금티를 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무수한 농민군들, 그들은 어떻게 싸웠나. 분명한 것은 그이들이 아무런 작전도, 전략도 없이 부나방처럼 몸을 내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 굳이 공주였는가 묻지 마시라. 충청의 공주는 호남의 전주와 다르지 않다. 공주는 백제 이래 충청권의 심장이었다. 농민군과 그 지휘자들에게는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지략이 있었고 무엇보다 하늘을 찌르는 의기가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해외 침략에 맞선 최초의 민중항쟁, 갑오년의 농민전쟁은 절대적인 화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됐다. 그러나 그이들은 비록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조선의 새 하늘을 열었다. 조선의 근대는 그이들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자양분은 오늘도 마르지 않고 샘솟고 있음이라.

박홍규, 피노리 가는 길, 2014, 45X105, 목판화

"우금치 산마루에 통곡 소리 묻히고..“ 공주 시내에 불빛이 들어오고 산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우금티 전투로부터 불과 20여일, 퇴각을 거듭하던 전봉준 장군은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부대를 해산하고 피노리를 향한 잠행길에 접어든다. 갑오년이 저물고 조선 천지가 깜깜한 암흑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