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눈이 꽤 내렸다.
날이 말짱 개여 아닌 보살 하고 있지만 눈은 분명 새벽녘에야 내렸다.
오랜만에 내린 눈다운 눈, 눈 내린 날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산에 가는 것 말고..
하여 나는 산으로 간다.

신기 마을 지나 산으로 드는 길, 더 이상 차가 오르지 못한다.
네 바퀴가 다 헛도니 달리 도리가 없다.
차가 자동으로 뒤로 돌면서 고랑에 빠졌으나 4륜 구동의 위력으로 가볍게 빠져나왔다.
여기서부터 걸어서 간다.

용추폭포 방면 들머리, 장담하건대 이 길을 거슬러 방장산을 오를 사람 아무도 없다.
눈 없는 낙엽길에서도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거듭하며 힘을 쏟아야 하는 급경사 직등길인 데다 접근이 쉽지 않은 탓이다.
오늘 방장산은 동서종주가 아니라 남북을 횡단하는 숫눈길이다.
눈길은 아무래도 전인미답의 숫눈길이라야 제맛이니 눈 내린 방장산의 정취를 가장 높은 경지에서 누릴 수 있는 길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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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경사길을 거슬러 능선, 방장산 주릉까지 약 1km, 산길은 다소 편안해지지만 주릉을 앞두고 다시 거칠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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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이 자글자글 심난허게 생겼다.
하나 원기 충천한 몸이 새털처럼 가볍다.

눈을 치떠야 볼 수 있던 높다란 봉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다.
주릉이 가까워진 게다.

단 한 군데 조망이 트이는 곳, 눈 덮인 신림 들판이 눈 아래..

들판 너머 경수지맥과 소요지맥이 인천강을 사이에 두고 으르렁대며 자웅을 겨룬다.
그곳에 선운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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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릉에 당도했다.
지나온 거친 산길을 잠시 돌아본다.
예서 봉수대까지는 지척, 조망 잘 터지는 칼날 능선이 시작된다.

봉수대에는 장이 섰다.
주릉을 종주하는 사람들, 버스 두 대는 족히 됨직한 사람들이 내뿜는 소음이 장난이 아니다.

방장산은 정맥의 망루, 갈재 너머 성채 같은 입암산, 그 뒤로 굽이치는 호남정맥이 흘러간다.

치열한 산세, 호남정맥은 이 구간에서 남북으로 종횡무진 용트림한다.

써레봉 지나 갈재, 갈재 지나 입암산 시루봉, 그 너머 내장에서 백암으로 흘러가는 호남정맥

두승산

들판 가운데 거연히 솟은 두승산, 평지돌출이라 여겨지지만 방장산에 탯줄을 대고 있다.
들판 더 멀리 백산이 가늠된다, 갑오년 농민군이 지펴 올린 봉화가 타올랐던 혁명의 성산..

정상에 올라 지나온 길 돌아본다.
아직도 장마당처럼 사람 소리 들끓는 봉수대가 지척이다.

입암산성은 가히 천혜의 요새, 산세만 봐도 알겠다.
저 성채 너머 잠행에 나선 녹두장군이 스며들었던 산성이 들어앉아 있다. 1894년 12월 25일(양력)이었다.
내장산 신선봉, 백암산 상왕봉이 가늠된다.

고개를 돌려 서해바다 방면, 고창 들판과 선운사 고라당을 바라본다.
여기서 주릉과 결별하고 장성 방면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능선으로 접어든다.

지능선 초입은 매우 거칠다. 이곳에 길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산죽밭을 얼마간 헤쳐가면 편안한 길이 나타난다.

적설량이 많다.
지금껏 걸어온 길에 비해 거의 두 배, 눈이 무릎을 넘나든다.
전인미답의 숫눈길이지만 전반적인 내리막길이라 발걸음에 속도가 붙는다.

조망이 열린다.

치열하게 흘러가는 영산기맥, 영산기맥 전 구간을 통틀어 가장 멋진 구간이 아닐까 한다.

남쪽으로는 병풍산과 불태산이 듬직하다.

장마당 같던 봉수대에서 먹지 못한 점심을 먹는다.
보온병 좋다. 전혀 식지 않았다. 법성 토주로 담근 탱자술 석 잔에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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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거칠어진 산길,
길이여 길이여 너의 끝은 그 어디~
한생을 걸어도 못다 걸을 길이여~

시야는 좁지만 장성 방면 조망이 한 번 더 터진다.

불태산 너머 지금껏 보이지 않던 무등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능선은 급하게 계곡으로 내리 꽂힌다.
깊은 눈이 내린 방장산, 오늘 산행이 끝나간다.

양고살재 도로에 내려선다.

먹이를 찾아 나선 되새가 종종거리는 곳.
오늘 산행 끝, 사대 삭신이 뻑적지근하다.

방장산_남북횡단.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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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빛 좋다.
노을 좋은 우리 동네, 세상 어디 내놔도 남부럽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