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양력),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본대가 후퇴를 거듭하여 전주에 이르렀다. 청주성 전투에서 패한 김개남은 논산에서 전봉준과 합류하여 함께 전주로 들어왔으나 곧 다시 헤어졌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나주를, 순천의 김인배는 전라좌수영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 이들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봉준은 12월 21일과 23일 원평과 태인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른 후 부대를 해산하고 잠행에 들어갔으나 28일 순창 피노리에서 피체되었다. 하루 앞선 27일 손화중과 최경선이 부대를 해산했다. 이날 태인에서 피체된 김개남은 채 48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전주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12월 31일 이방언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흥을 함락하고 부사 박헌양을 처단했다. 1월 1일 김인배가 순천에서 피체되어 효수되었다. 그 이튿날 일본군에 인계된 전봉준이 나주로 압송되었다. 최시형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은 무주, 영동을 거쳐 보은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장흥의 농민군은 석대들 혈전을 앞두고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뜨거웠던 갑오년, 조선 천지는 농민군이 내뿜는 혁명적 열기로 진동했을 것이며, 그해의 끝자락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흩뿌린 선혈에 산천초목도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들이 내걸어야 했던 목숨은 10만에서 30만에 이르렀다. 이들의 투쟁은 종착점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이었음을 우리는 지난 2년간의 동학농민혁명 연재를 통해 확인했다. 
그로부터 129년이 지났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들이 내걸었던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기치는 어찌 되었는가?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발걸음은 옳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날의 패배가 오늘의 우리를 규정하고 있음을, 그해 이루지 못한 농민군의 비원이 오늘날 우리의 어깨에 지워져 있음을...
갑오년의 농민군 또한 그리 싸웠을 터이다. 조선 말기 100년의 역사가 민란의 역사라면, 그 민란의 역사를 집대성하고 응축시켜 폭발시켜낸 것이 동학농민혁명이었다면, 그들 역시 역사의 대전환기에서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해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후대의 모범이 되고 밑거름이 되었다. 나라의 통치집단과 지배세력의 가렴주구에 맞선 투쟁이 어떠해야 하는지, 외래 침략자들에 맞선 거족적 투쟁은 어떠해야 하는지, 심지어 패배가 초래할 참혹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하여 감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갑오년의 투쟁이 없었다면 을미년의 투쟁도, 을사년, 정미년의 투쟁도, 일제 36년간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무장투쟁의 총성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에선가 좌절하고 낙담하게 될 때 그것이 혹여 강요된 식민사관 위에 싹을 내린 역사적 허무주의, 나아가 사대주의와 연결돼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그 시절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보자는 것이 아니다. 지난 역사 속에 깃들어 있는 전통과 계승, 흐름과 맥락을 온전히 들여다보게 될 때 우리는 역사탐구의 희열에 들뜨게 되고, 우리의 혈관에 흐르고 있는 선열들의 뜨거운 피를 감지하고 전율케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고색창연한 성곽의 돌멩이 한 개, 오래된 산길 고갯마루의 돌무더기, 심지어 산천초목도 달리 보이고 새롭게 해석될 터이니 이쯤 되면 찬란한 우리 민족 5천년의 역사가 가슴 벅차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그리하면 때가 되어 다시 들게 될 촛불의 무게도 남달라질 것이다. 권하노니 갑오년 농민군의 투쟁,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의 삶에 대해 품을 들여 들여다보시라.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