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나의 삶을 규정한 매우 결정적이며 전환적인 영향을 끼쳤던 잊지 못할 장면과 사람들이 있다. 

세월이 가도 퇴색되지 않고 더욱 선명해지는..

공부와 담을 쌓고 살던 고2 겨울방학, 형과 나는 '수학1의 정석'을 매개로 한해 겨울을 고향집에서 함께 보냈다. 

형은 전남대 80학번으로 치대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서울에 유학중이었다. 

수학이 맹탕이었던 나는 형의 친절한 지도에 힘입어 실력이 향상되는 듯 했으나 학력고사에서 수학 20문제 중 4개만을 맞춰 8점을 취득하는데 그쳤다. 

그냥 찍었어도 더 맞았을 것인데 열심히 푼다고 푼 것이 그런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ㅎㅎ


그런데 정작 그해 겨울이 나의 삶에 끼친 영향은 다른데 있었다. 

당시 형이 읽던 창비의 시집들, 양성우, 문병란, 조태일, 김지하 등등..

지하에서 인쇄한 불온한 시집들..

나는 그것들을 탐독했고 나의 꿈은 저항시를 쓰는 국어선생이 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나의 머리 속에는 전라도, 황토길, 5월 등의 단어가 어수선하게 꽉 들어찼다.  

고3때 나는 묘한 놈이었다. 

좌우튼 형편없는 수학성적과 달리 수려한 국어성적에 힘입은 나는 사범대학에 진학하여 국어선생을 향한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또 다른 운명적 만남은 오늘날의 나를 농사꾼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농사꾼이 되어 25년..

세월이 흘렀다. 


형이 아프다. 몹시 아프다. 

의사 선생이 말하기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일렀다 한다. 

이제 나는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결정적이며 전환적 영향을 끼쳤던 형을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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