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12시, 밤재에 다시 섰다. 피노리 가는 길 마지막 구간을 간다. 
오늘은 대략 삼십리길, 여분산을 지나 피노리에는 어둠이 내린 후 도착하는 것으로..
이미 춘분이 지나 해가 충분히 길어졌다. 

내내 끝없이 이어지는 참나무 숲길. 때론 유순하나 때론 사나운 깔끄막..
전반적으로는 할랑할랑 걷는 편안한 산길, 따스한 봄 햇살에 겨울 남방이 부담스럽다.
꽃도 없는 황량한 숲에 호랑나비 너울너울 많이도 날아다닌다. 
성체로 겨울을 난 뿔나비도 제 세상을 만났다. 

내 꿈속에 너인 듯, 니 꿈속의 나인 듯..
꿈꾸듯 걷다 만난 녀석들 운우지정을 나누고 있다. 

저기 멀리 추월산은 남쪽으로, 내장산은 북쪽으로 달린다. 
그 중간쯤 잣방산이 솟았다. 
지나온 길이 훤히 가늠된다. 

잣방산은 몹시 기운 넘쳐 보인다. 
뭔가 기가 응축된 듯..

 

일순 하늘이 소란스러워 고개를 드니 흑두루미들이 떼를 지어 북상하고 있더라. 
그래 순천만에서 북상하자면..
지난번 순창읍내 경천에서 봤던 흑두루미는 경로에서 이탈한 게 아니라 잠시 내려앉은 것이었나 보다.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몇 해 전 찾았던 겨울 여분산은 심심산골 분위기였는데 그 사이에 군데군데 임도가 능선을 넘나들고, 삭벌에 간벌에 산이 영판 달라져 있다. 

여분산 상봉을 지척에 두고 사과를 씹으며 생각한다. 
들렀다 갈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 
남은 거리와 해의 길이와..
이모저모 궁리하다 그만 졸음이 몰려와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다 결론을 내렸다. 
그래 나는 지금 녹두장군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니 여분산 상봉에는 안 가는 게 맞겠다. 
핑계거리를 찾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여분산 상봉 반대짝으로 길을 잡는다. 

상상봉이라는 표지기가 나오고 능선이 갈린다. 
직진하면 깃대봉,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종아리를 넘는 수북한 낙엽, 우거진 산죽, 산길이 거칠어진다. 
봉우리마다 흙과 낙엽으로 매워져 가는 오래된 참호의 흔적 역력하다. 

신광사재, 이 고개는 피노리에서 피체된 녹두장군이 압송된 길이다. 
용전리에서 금창리로, 여분산과 회문산 사이로 압송된 고갯길이 이어진다. 
지금은 능선을 타고 피노리로 가지만 내일이면 고개를 넘어 나주로..
녹두장군이 이 산길을 걸어 피노리로 갔다면 불과 하룻만에 다시 이 고개를 넘는 심사는 어떠했을까를 가늠해 본다. 

고갯길 모탱이를 돌아 장군 일행이 불쑥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은 생각에 한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늘 갈 길은 저 길이 아니다. 
장군은 지금 재기를 위해 한양으로 가는 길이다. 

생강나무꽃
아무르장지뱀

어찌 되얐건 봄은 봄이고..

노송이 드리운 가지 사이로 회문산을 본다. 

깃대봉
 

저 멀리 잣방산, 잣방산을 에돌아 굽이굽이 흘러 내려오는 추령천이 보인다. 

 
 

매봉을 지나니 해가 서산에 기운다. 푹신한 멧돼지 잠자리 지나 봉우리를 몇 개나 넘었을까?
마지막 봉우리가 보인다. 저 봉우리 지나 피노리 쪽으로 뻗은 가지능선 타고 내려가 추령천을 건너면 된다. 

아.. 그 마지막 지점에 조망처 하나 있더라. 
백양사에서 피노리에 이르는 지나온 산길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마치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한 천혜의 조망처..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지는 해와 더불어 지나온 산길을 총화 하듯 더듬었다. 

내장에서 백암 지나 시야에서 사라진 호남정맥이 추월산 산줄기로 되살아나 북상하는 중앙부에 잣방산이 자리 잡고 있다. 
산과 산 사이 작은 들판을 일구며 휘감아 내려오는 추령천은 가히 쌍치면의 젖줄기라 하겠다. 
사진 오른편 산 아래 마을이 피노리다. 

저 멀리 맨 뒤편, 외약짝에 회문산 오른짝에 여분산 봉우리가 살째기 드러난다. 

피노리 뒤편으로 해 넘어간다. 

 

해 꼴딱 넘어가고 어둠이 깃든다. 
피노리 뒤편 펑퍼짐하게 솟은 봉우리는 계룡산이라네.. 
그것 참.. 

세 번째 만나는 추령천, 이 개울을 건너면 피노리..
어둠이 내린 피노리에 불빛이 들어왔다. 

피노리 마을 입구, 주막은 어디쯤에 있었을까? 나는 마을에 들어가지 않았다. 

벡양사에서 피노리까지 세 번에 걸쳐 산길을 탔다. 
산중에서 한뎃잠 자고 이틀 만에 당도하는 여정은 올 겨울에 다시 잡아보는 것으로..
사실 잣방산을 지난 이후로는 녹두장군 일행이 과연 산길로만 피노리에 가 닿았겠는지 여러모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게 되었다. 
당시 조일 연합군과 민보군을 비롯한 적정이 어느 정도였겠는지, 쌍치 산고라당까지 조일 연합군의 첩보망이 얼마나 펼쳐져 있었겠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잣방산 이후의 행로는 온전한 산길 말고도 추령천 주변에 널린 산과 산, 마을과 마을 사이 무인지경을 뚫고 보다 빠르고 안전한 길을 잡을 수 있었겠다 생각된다. 
다만 당시의 이동경로를 유추해볼 어떠한 단서도 세간에 전해지지 않는 것은 그 누구와도 접촉이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어 장군이 걸었던 '피노리 가는 길'이 내가 걸었던 산길과 상당 부분 일치하지 않겠는가 미루어 짐작해 볼 따름이다. 

200321_밤재피노리.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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