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무명농민군, 2009, 52x32cm, 목판화.

돌아보면 우리 역사의 어느 한순간 격렬하거나 숭고하지 않은 때가 없다. 격랑의 근현대사에서 5월은 특히 그러하다. 80년 5월 광주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이고도 전투적인 투쟁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세월을 좀 더 거슬러 동학농민혁명의 연대기를 들여다보자.

1만여 농민군이 집결한 백산 대회, 황토현 전투와 황룡강 전투, 전주성 점령에 이르는 승리와 환희의 순간들 모두가 5월 한 달 동안에 있은 일이다.

2018년 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정했다. 이날은 농민군의 빛나는 첫 승리인 황토현 전승일이다. 당시 조선의 5월은 어땠을까? 6월 말, 하지 전후를 모내기 적기로 삼던 때였다. 1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모내기 시기가 한 달여 앞당겨졌다.

30여 년 전,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꽤 많은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망월동을 참배하고 금남로 가두시위에 함께 했던 것을 생각하면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많은 것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농민들은 무지막지하게 바쁜 5월을 제정신 없이 전전긍긍하며 보내고 있다.

‘사람이 곧 하늘’ 무명농민군, 동학혁명에 나서다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눈앞에 현신한 ‘동학 무명농민군’을 곰곰이 들여다본다. 이름도 성도 없이 서 계신 네 분의 농민군, 이들은 누구의 아버지이고 아들이었을 것인가? 이들은 어떻게 싸웠을까? 그 처절한 싸움터에서 한 분이라도 살아남았을까?

그런데 작두를 매고 서 계신 이는 무명이 아니다. 작두장군 만득이, 유월례의 남편이자 미륵이의 아버지, 그는 황토현 전투에서부터 장흥 석대들 전투에 이르기까지 작두장군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장흥의 마지막 전투에서 유월례와 함께 장렬히 전사한다. 강보에 싸인 그의 아들 미륵이만이 농민군들의 품에 안겨 역사 속으로 스며들었다. 작두장군 만득이는 소설 ‘녹두장군’ 속 인물이다.

그는 머슴 출신이었다. 함께 서 계신 다른 이들도 머슴 혹은 가난한 소작농이었을 터, 한낱 무지렁이로 취급받던 이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동학농민군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며 너나없이 귀하다는 이들의 평등사상, 이것은 동학농민혁명을 혁명이라 이름 지은 결정적 근거가 된다.

그리고 그들이 내걸었던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깃발, 투쟁하는 민초들에 의해 역사는 전진해왔다. 갑오년 이전과 이후 조선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됐으며 항일구국투쟁, 반외세자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책임자 처벌 없는 국민통합은 허울

5월 영령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무명열사의 묘 앞에 서 보았는가? 그 어떤 이름보다도 강력한 그 묘비명 앞에서 비분강개한 마음에 치 떨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원미상인 무명열사들, 무덤조차 없이 무주고혼으로 떠돌고 있을 5.18 행불자, 그날의 시민군들, 그들은 판화 속 무명농민군들만큼이나 평범했을 우리 이웃들이었다.

하여 생각해 본다. 우리는 역사상 얼마나 많은 무명열사, 정다운 이웃들을 무주고혼으로 떠돌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아직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희생자에 대한 정당한 예우에 관한 문제조차 매듭짓지 못하고 있다. 단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도, 단 한 치의 역사 왜곡도 용인해서는 안 될 일이다.

기념일을 제정하는 것으로 할 일 다 했다 말라. 기념식장의 몇 마디 연설로 생색내고 으스대지 말지어다. 대규모 학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역사적 단죄를 전제하지 않고 정신계승이요, 국민통합이요 떠들어대는 것은 다 허울이요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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