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비망록, 2021, 60X100cm, 목판화

바람 부는 보리밭, 
내 인생에 이런 출렁거림이 언제 있었던가

그해 6월,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휴전이 성립됐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지 열흘 만이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은 격랑에 휩싸였다. 조정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는 청일 양군의 조선 출병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곧바로 침략군, 점령군으로서의 본성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기 나라 백성을 학살케 한 치욕의 역사가 이로부터 비롯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정은 당황했다. 농민군 또한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조정이 받아들인다면 해산하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초토사 홍계훈이 이를 수락함으로서 이른바 ‘전주화약’이 체결됐다.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으며 농민군과 조정의 속사정도 각기 복잡했으나 청일 양군의 조선 출병이 결정적 요인이 됐음은 명백하다.

폐정개혁·전주화약 그리고 집강소

농민군들은 성에서 물러 나와 전라도 각 군현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패잔병이 아니었다. 손에는 총·창을 거머쥐고 적게는 수 명에서 많게는 1,000~2,000명씩 대오를 이뤄 질서 있게 퇴각했다. 이들은 단순히 자기 고을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호남의 북부와 호서 일대는 송희옥과 서장옥이, 호남의 서부 권역은 김덕명과 손화중이, 전라좌도 지역은 김개남과 김인배 등이 각각 장악하여 솥을 떠받치는 다리 형상을 이루고, 전봉준은 자유롭게 각지를 순회하여 이들을 통괄하거나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전봉준 평전 <봉준이, 온다> 이광재 저).’

이들에 의해 나주를 제외한 호남 일대의 각 고을에서 농민군에 의한 집강소 통치체계가 세워지게 됐다. 향촌의 지방군을 압도하는 농민군 무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를 잇는 농민들, 전봉준투쟁단

일단의 댕기머리, 더벅머리 농민군들이 이삭 출렁이는 보리밭을 지난다. 6월 11일(양력) 전주성에서 나왔으니 아마도 이들은 6월 보름께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허나 이들이 향하는 곳은 고향집이나 논밭이 아닐 게다. 연인과의 짧은 재회, 다시 떠나가는 농민군, 이들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있었다. 지도부의 통문이 전해졌다.

“청군이 물러간 뒤 다시 의기를 들까 하니 각 군 장졸들은 각별히 유념하여 명령을 기다리라.”

그들은 또한 애당초 폐정개혁에 대한 정부의 성실한 대응을 기대하지 않았다.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아래로부터 폐정개혁을 단행해 나가는 데 있어 총·창을 거머쥔 청년 농민군들은 가장 큰 원동력이 됐을 터이다. 당시 이들의 가슴 속을 가득 메웠을 그 벅찬 환희와 열정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을까?

2016년 12월 9일, ‘전봉준투쟁단’은 국회 앞에 있었다. 이른 새벽 수원을 출발한 전봉준투쟁단 대장트랙터가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리며 국회를 향해 질주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트랙터들이 속속 국회 앞에 당도했다. 국회에서 박근혜 탄핵안이 가결되자 광장은 일순 환희와 열정에 휩싸였다. 전봉준투쟁단과 농민들은 트랙터 위에 올라 해방춤을 추며 승리를 만끽했다.

그날의 해방감과 환희, 광장을 가득 메웠던 혁명적 열정을 돌아보라.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과 투쟁으로 쟁취한 승리, 세상을 바꾸는 그 힘이 바로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비롯됐다는 벅찬 감정이었다. 21세기에 다시 등장한 농민군 전봉준투쟁단, 그들은 역사를 잇는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람 일렁이는 보리밭 총각 농민군들 가슴마다 출렁거렸을 혁명적 낙관과 낭만이 아닐까.

한국농정신문(http://www.ikpnews.net)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