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전사가 가는 길, 2021, 160x80cm, 목판화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잠행에 들어간 전봉준 장군은 사흘 만인 12월 28일(양력) 피노리에서 피체되었다. 하루 앞선 27일 태인 종송리에서 김개남 장군이 피체되었다. 전봉준은 나주로 김개남은 전주로 압송되었으며 전주로 압송된 김개남은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이도재에 의해 즉결 처형되었다. 그로부터 10여일 후에는 손화중 장군이 고창에서 피체되었다.
이즈음 농민군들의 형편은 어떠했을까? 부대는 해산되었으되 돌아갈 곳이 없었다. 시시각각 추격해오는 조일 연합군, 앞을 막아서는 민보군이 기승을 부렸다. 내내 숨을 죽이고 사세를 엿보던 양반과 부호들이 토벌대를 조직해 농민군 살육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조일 연합군, 특히 조선 실정에 밝지 못한 일본군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어 농민군을 색출하고 살육하는데 앞장섰다.

농민군, 역사 속으로 스며들다

세밑, 장흥의 농민군이 전투를 개시했다. 이방언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흥성을 함락하고 부사 박헌양을 처단한 것이다. 양력으로는 섣달 그믐날이었다. 항쟁의 불꽃은 10여 일간 타올랐다. 당시 전라도 남부에는 강력한 주력부대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의 남해안 상륙을 염려하여 우금티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장흥의 이방언 부대가 그러했으며, 손화중과 최경선 부대 역시 광주를 거점으로 남아 있었다. 등짝의 가시처럼 박힌 나주의 민보군 세력 때문이기도 했다.
남도의 농민군들이 대거 장흥으로 모여들었다. 찬연한 남도의 불꽃이 세차게 타올랐다. 이들은 인근 강진과 병영성까지 접수하고 일시에 남도를 석권했다. 하지만 이들의 항쟁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일본군 주력부대들이 장흥에 다다르고 놈들의 치밀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 앞에 농민군들은 혈전을 치르며 탐진강을 건너, 자울재를 넘어 또다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농민군들 앞에는 살아남아 역사 속으로 스며드는 길 외에는 없었다.

며칠 뒤 각 고을에는 해남에서 마지막으로 동학비도 3만여 명을 소탕하여 나라의 화근을 뿌리째 뽑아버렸으니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이 나붙었다. … 온 세상은 깜깜한 암흑 속으로 들어갔으며 암흑의 끝은 일제의 조선 강점이었다. 마침내 민족이 멸망의 벼랑 끝에 몰리자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농민들은 잡초처럼 또 일어나 녹슨 화승총을 들고 다시 일제와 처절하게 싸웠다.
(소설 녹두장군, 송기숙 저)

1909년 일제는 조선 강점의 마지막 단계에서 ‘남한(오늘날 전남) 대토벌 작전’을 감행했다. 1909년의 제3기 의병투쟁은 오직 농민들이 주력이었으며 호남 지역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다. 겁을 먹은 일제는 의병투쟁의 마지막 근거지인 호남 지역을 초토화하기 위해 육지는 호남정맥과 섬진강을 따라 둘러싸고 바다는 군함으로 막아 장장 3천리에 걸친 포위망을 형성하여 골골 샅샅이 이 잡듯이 잡아 죽이고 의병 나간 동네는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대토벌 결과 사망자 17,779명(의병장 108명), 부상자 376명, 포로 2,139명이었다.

그들은 이름도 내세우지 않고 싸웠던 까닭에 대부분 이름도 남아 있지 않고, 이름이 없으니 묏등이나 비석도 있을 리 없다. 싸우다 산과 들에서 죽고 논밭에서 썩어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났다.
(소설 녹두장군, 마지막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