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새 세상을 여는 사람들, 2023, 90x200cm, 목판화.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 새벽, 컴컴한 적굴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은 불과 하루 전 법무아문 권설 재판소에서였다. 판결은 그날로 국왕의 재가를 받아 날이 바뀌자마자 형이 집행되었다(속전속결, 훗날 이날의 모범을 충실히 따른 자가 있었으니 박정희다. 이 자는 인혁당 재건위 관련 피고인 8명을 형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시켰다. 세상에는 역사를 이렇게 계승하는 자도 있다).

1894년 4월 백산대회에서 이름을 올린 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 총참모 김덕명, 영솔장 최경선, 전주에서 이미 즉결 처형된 총관령 김개남 장군을 제외한 농민군 최고 지도자들이 한날한시에 명을 달리했다. 함께 처형된 성두환, 이분만이 낯이 선 데 그이는 충북 청풍 출생이다.

갑오년 충북 지역 농민군 대장이 되어 9월에는 강원도로 진출해 강릉을 점령했으나 일본군에 밀려 영월, 평창 농민군과 연합해 정선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평창에서 대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한 뒤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됐다. 굳이 따지자면 북접의 맹장인 셈이다.

4월 24일, 이들의 처형으로 조선 천지를 뒤흔들었던 동학농민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추포 이후 처형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와 행로는 이후 조선의 멸망과 식민지화, 해방 후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중들이 겪어야 했고 지금도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을 상징적이고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법무아문 권설 재판소는 김홍집 친일 내각에 의해 만들어진 사법 기관이다. 재판장 서광범이란 자는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뒤 미국 시민권을 땄다. 미국 이름 ‘케네스 서’, 일본 영사 이노우에의 도움으로 돌아온 서광범은 법부대신 겸 판의금부사로 등용돼 근대의 이름을 빌어 참수형이 아닌 교수형을 선고했다.

반면 사형선고는 조선 법전 ‘대전회통’에 의거한 것이었으니 농민군 지도자들은 미국 놈인지 조선 놈인지도 불분명한 자에 의해 근대의 탈을 쓴 봉건의 형률로 처형에 이른 것이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체포와 심문, 재판에 이르기까지 일본 영사관이 상황을 주도하고 지휘했음은 물론이다.

새로운 세기 개척할 20세기 전봉준

재판 과정,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전봉준 장군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동학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자니, 탐학한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자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악행을 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를 없애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단하여 사복을 채우는 자를 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너희는 외적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해하는 자들이다. 그 죄 가장 중대하거늘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

전봉준과 농민군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구체제는 농민전쟁을 통해 치유할 수 없는 내상을 입었다. 비록 권력을 잡은 농민군이 어떤 사회를 만들어 나갔는지 역사 속에서 확인하는 재미는 없지만 패배하고도 승리한 싸움을 보는 우리의 경외감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한반도의 20세기는 저 갑오년에 시작되었다고, 그러나 그 세기의 상처가 이렇듯 선연하다면 아직 20세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고, 때문에 20세기의 전봉준이 되어 허리에 두른 족쇄를 걷어낸 한반도의 다음 세기를 열어젖히는 일은 우리 모두의 당연한 의무라고, 항구적 평화와 행복이 유보되어 있는 한 언제나 우리가 전봉준이라고.
- 전봉준 평전 <봉준이, 온다> 이광재 저


1990년 4월 24일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창립되었다. 전농은 창립선언문에서 갑오년 농민군의 후예임을 자랑스레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날이 어떤 날이었는지 창립 당시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필연 앞에 때론 모골이 송연해진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http://www.ikp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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