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는 벌초와 성묘만으로 자손 된 도리를 다하기로 했다. 
송편을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보름 후에 있을 어머니 기일에 집중하겠다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다.  
하여 성묘를 마친 우리는 각자 흩어졌다. 
나는 산으로 간다. 추석 보름달을 맞기엔 산 만한 곳이 없다. 

입암산 남창골, 새벽에 내린 비로 산은 온통 물 투성이로 축축하다. 
산성 남문을 지나 북문을 거쳐 갓바위에서 달을 맞을 계획이다. 
이 길은 입암산을 오르는 가장 편안한 길이다. 

두꺼비들이 발에 밟힐 지경이다. 
녀석들은 사람들의 발길을 과히 두려워하지 않는 듯 엄금 엄금 제 갈 길을 간다. 

주차장으로부터 대략 3km, 산성 남문을 지난다. 
본래부터 그랬을까? 남문 사이로는 늘 물이 흐른다. 
입암산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송군비 장군이 몽골 침략군을 맞아 승전(1256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3백여 년 후 의병장 윤진이 왜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1597년)했다. 
다시 3백여 년 후 우금치 혈전을 치른 전봉준 장군이 산성에 의탁(1894년)하여 하룻밤 머물렀다. 

산성 문짝을 걸었던 돌 둔테가 남아 있다. 

물길이 본래 이리 나 있지는 않았을 터인데..

산성 마을터의 확독

70년대 1백여 주민이 살았다 하고 80년대 마지막까지 마을을 지킨 사람들은 유불선 갱정유도를 믿는 사람들이었다고. 
그들 중 일부가 고창 유점 마을 일대에 살고 있다. 
이곳에 처음 왔던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구들이며, 무너진 다무락 등이 남아 있어 마을의 존재를 보다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산성 내 관아 건물이 있었다는 진헌지를 지난다. 
전봉준 장군이 머문 곳도 아마 이곳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산성 별장과 통한 걸음이었으니..

해 넘어가는 모양이다. 
좀 더 서둘렀어야 하는데 좀 늦겠다. 

북문 지나 능선 성벽을 밟아 갓바위 어귀에 당도했다. 
갓바위로 통하는 길목을 커다란 거북이 적정을 살피듯 목을 빼들고 지키고 있다. 

갓바위 지나 시루봉, 입암 갈재 지나 방장산이 우뚝 솟아 구름을 이고 있다. 
이 산줄기는 영산기맥에 해당하고 방장산은 영산기맥에서 가장 큰 산 덩어리가 되겠다. 

달이 이미 솟았겠는데 구름 속에 들었다. 

 

어둠이 보다 짙어지고 하늘과 땅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온다. 

 
 

구름 속에서 달이 나오고 중천에 이를수록 구름은 사라져 달빛 교교한 밤이 되었다. 
허나 죽을내기로 불어오는 바람 탓에 전혀 고요하지 않다. 
정신을 앗아갈 듯한 바람이 밤새 불었으나 혼곤한 잠에 빠져들면서 바람소리 또한 자장가가 되어주었다.


아침이 밝았다. 
바람은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옅은 구름이 쉴 새 없이 산을 휩쓸고 있다. 
달이 졌는지 해가 떴는지 알 수 없는 시각이다. 

 
 

구름은 걷힐 듯 말 듯, 해는 나올 듯 말 듯, 비는 내릴 듯 말 듯..
뜨는 해는 끝내 보지 못했다. 
텐트 안에서 뒹굴뒹굴 시간을 죽이다 벌떡 일어나 짐을 꾸린다. 
아뿔싸 늦었다. 짐을 꾸리는 사이 아들을 거느린 부부가 다녀갔다. 
그 누구도 오기 전에 흔적 없이 사라졌어야 하는데..

 
 

짐을 꾸리고 잠시 산을 내려다보는데 줄포 방면으로부터 시커먼 소나기구름이 맹렬한 기세로 들판을 가로지른다. 
엄청난 마기가 엄습하듯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일진광풍이 휘몰아치더니 곧바로 비가 뒤따른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 지경의 거센 돌풍에 온 산의 나뭇잎이 치를 떨고 낙엽이 하늘로 치솟았는데 차마 그 광경은 사진에 담지 못했다. 우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배낭 짊어지고 뛰기 바빴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다. 

비를 피할 만한 바위가 지척에 있어 무척 다행이었다. 
좀 늦었더라면 짐을 꾸리다 난리가 났을 것이고, 좀 빨랐더라면 산길을 걷다 물에 빠진 생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간발의 절묘한 시간차로 돌풍과 소나기로부터 몸을 보전했다. 
나보다 앞서 산을 내려간 부부와 아들이 걱정되었다. 
30분가량 거센 바람 소나기가 쏟아지고 하늘은 쉴 새 없이 우르릉거렸다. 
다행히 낙뢰 없이 구름 속에서만 난리가 났다.  

 
 고부 두승산
 
영산기맥이 흘러간다.
호남정맥의 산군 

비구름 동짝으로 몰려가니 서짝 하늘 밝아온다.
모진 비바람을 떨치고 산이 깨어난다. 
이제 내려갈 시간이다. 

멀리 소요산과 변산반도 너머 위도가 보인다. 

선운사 배맨바위
위도
 
 
은선동
 

허리병 낫기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바위에 작대기를 걸쳐놓는다 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미신적 기원.

단풍잎 한 귀탱이 가을이 살째기 내려앉았다. 
나는 무사히 산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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